2010. 8. 2. 06:57

계속 되는 내분 (사무엘하 18장 5절)

본문 : 사무엘하 18장 5절
제목 : 계속 되는 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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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강-삼하18장5(계속되는내분)-2sa100801

계속되는 내분 

2010년 8월 1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18:5

(삼하 18:5, 개역)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압살롬이라는 막강한 신진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서 다윗은 진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너그럽게 대하라’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립니다. 전쟁이란 일단 모든 동정심을 접어두고 시작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전쟁에 인간미가 끼어드는 것은 사치일 것입니다. 전쟁에 있어 여유를 부리게 되면 고조된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위험한 요소입니다. 

간부급에 해당되는 신하들은 이런 다윗의 지시는 사적인 부탁처럼 여기고 건성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간부급들은 다윗언약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압살롬이 지닌 반 다윗적인 정서는 바로 다윗 진영 쪽에도 가득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우리가 권능을 행사하고 귀신마처 추방시키는 기적을 행했습니다”고 나오더라도 예수님은 그들 편이 아니라는 과 같습니다.

다윗편에 속한 압살롬 성향을 노출시키는 데는 바로 이 “너그럽게 대하라”는 한마디로 지시로 충분합니다. 간부급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립니다. 즉 ‘누구 누구의 사람’으로 평생 남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는 생리에 맞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란 겉으로는 비록 왕, 즉 ‘우리들의 지도자’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권력자를 잘 이용해서 그 기회로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가겠다는 심보들로 우굴거립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 “너그럽게 대하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의 간부급들은 결코 ‘자신을 위한 전쟁’을 한시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압살롬의 의식도 동일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이런 육적인 요인들이 각질처럼 계속 일어나는 것이 본디 다윗언약이 지닌 내부적 본질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악한 것들이 들추어져서 위로 올라와 표면화되는 것이 이 세상의 양상입니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변화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의 취지를 깔아두면서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되심을 노출시키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곧 ‘숨어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전면에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에 준한 왕을 앞장 세우시고는 숨어계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겁니다.

잠언 25:2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에 의한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시켜 나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나 간부급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어두운 겁니다. 그저 코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신의 자존심을 다 걸고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선 높이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다윗언약은 상위의 원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더 높은 곳에서 작용하는 그 원칙이란 곧 왕이란 멜기세덱의 계열이라는 원칙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시편 110:4-5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서열에 의해서 업무가 진행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이라는 분은 왕이면서도 제사장입니다. 당연히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왕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결국 제사장으로서의 왕, 혹은 왕으로서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나오는 발언들입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움직이기 때문에 다윗 언약에 속한 왕들이 치뤄야  전쟁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원칙을 준수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하는 민족입니다. 언약으로서 비언약을 척결하는 임무를 띤 전쟁입니다. 그 중심에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있는 겁니다.

간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요압은 이러한 상황을 몰랐습니다. 그는 다윗왕을 대하면서 그저 왕이라는 명칭을 가진 자기 시대의 최고 권세자라는 견해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왕을 존경하는 것조차도 자신의 권력욕을 감추기 위한 용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바로 상대하지 않고 왕을 통해서 상대해야 하는가 하는 그 심정을 이해하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참된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적어도 그 시선의 높이가 멜기세덱의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서는 멀리 아담까지도 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루는 그 원칙과 방침이 그 이후의 모든 아담의 세계에 차질없이 전개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오늘날 그 아담의 물결에 이미 휩쓸려있음을 안다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시기에 왜 저를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까?”라는 물음 말입니다. 만약에 이런 시선의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지상으로 낮추어져 있다면 다음과 같이 생활 할 것입니다. 즉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야. 나는 그 누구와도 다른 인간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식은 곧 자립성을 행사하기 위해 당연히 힘과 힘을 더 붙여야 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즉 일어나는 모든 사태가 자신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18:10-11에 보면,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고 나옵니다.

그만큼 왕의 지시를 무시하라는 겁니다. 부하 입장에서 바로 위 고참이 제일 무서운 법입니다. 그래서 간부급이 과감하게 압살롬 시신에 창을 꽂자 그 부하 10명이 지체하지 않고 합세합니다. 사무엘하 18:15에 보면,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높이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라 그저 자기 생존 차원의 안목 뿐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담이 벌려놓은 악의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너그러움’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그래서 더 이상 우리 죄를 변명하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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