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9. 21:52

이어져서 열린 세계 (사무엘하 17장 27-29절)

본문 : 사무엘하 17장27-29절
제목 : 이어져서 열린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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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강-삼하17장27-29(이어져서열린세계)-2sa100718

이어져서 열린 세계

2010년 7월 1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7:27-29절
 
(삼하 17:27, 개역)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가』
(삼하 17:28, 개역)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삼하 17:29, 개역)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누구를 도와줄 때는 그만한 가치와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면서 도와줍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자체가 특정한 인물을 키워나가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면서 말입니다. 그 인물이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지입니다. 따라서 그 인물을 도와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됩니다. 

그 외의 장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이 세상이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 1:26-29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씨 있는 열매를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요 복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에 들어와서 방울토마토 먹는다고 영생을 얻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창세기 1장 지나고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오면 이미 인간 자체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세상도 저주받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폐쇄적인 영역이 따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즉 가죽옷을 입은 것이 축복이 됩니다. 아무리 씨 있는 열매를 배터지게 먹어 다녀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노아 시대에 들어오면 더 노골적입니다. 노아 방주는 그 바깥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그 방주 안에는 깨끗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2 쌍이 들어갑니다. 즉 이 세상은 깨끗한 것들과 더러운 것들이 상호 섞여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 될 자가 구원되고 구원되지 못할 자는 탈락되는 겁니까? 노아 당시에는 방주 밖의 세계는 있으나 없으나 소용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읽어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즉 구원의 방식은 인간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심판하는 방식과 관련 있는 식으로 장치가 마련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네가 천국 가봤어?” 하지만 복음 아는 자들은 천국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께서 미리 제시한 장치는 우리가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복받은 것은 그저 양이나 소나 늘어났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가 발생되고 그 씨가 나라를 이루고, 그 나라가 약속의 땅을 차지 한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복이란 딴 게 아니라 다윗의 가문을 하나님께서 직접 관리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에서 드디어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하나임에 살던 세 사람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윗이 곤궁에 빠졌을 때, 한껏 도와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폐쇄된 공간에서의 열린 활동입니다. 마치 나뭇꾼이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 같은 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밖에서 보면 폐쇄적인으로 칸막이가 쳐져 있지만 위에서보면 뚜껑이 없이 열려 있는 겁니다. 즉 아무나 들어 올 수 없으나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다윗 언약의 가치는 전의 언약처럼 수평적인 도와줌으로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역사를 통해서 보면, 비록 이스라엘이 망해서 그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해 바벨론이라는 이방나라로 팔려간다 할지라도 그 나라가서도 다윗언약의 약속이 도리어 더욱 만개하고 유효하게 작용한다면 여전히 구원의 퍠쇄공간은 지탱되고 있는 겁니다.

즉 망하는 것을 통해서 여전히, 도리어 더욱더 구원의 효력은 죽지 않고 활발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폐쇄공간이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될까요? 마태복음 끝에 보면,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의 복입니다.

신약 시대에서의 구원의 폐쇄공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완료된 상황으로 만들어주시기에 그 안에서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습니다. 사도행전 2:44-47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남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것이 됨을 압니다. 고린도전서 12:26에 보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처음부터 자기 세계를 털어버린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도로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날 성령받고 난 뒤부터입니다. 이 때로부터 교회는 열린 단체로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지고 자신의 것도 자기 것이라고 우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자기 삶이란 하나님의 일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마치 예수님 몸 안에 함께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남이 부유하다고 해서 그것을 시기해서는 아니됩니다. 정작 그 교회 내에서 필요한 것은 마지막 불 심판에서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구원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니까 선교비나 구제비를 얼마나 책정했느냐가 바른 교회의 표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에서 눈 돌리고 얼굴 돌리는 그런 태도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은 도와주어야 하는 겁니다. 수평적으로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을 하늘을 보고 사는 자들로 인도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일이요 예수님을 돕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정하지 않는 심판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구원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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