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6. 17:14

죽기를 원한다 (예레미야 8장 1- 4절)

죽기를 원한다

2009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1-4

(렘 8:1,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렘 8:2, 개정)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렘 8:3, 개정)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8:4, 개정)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사람이란 각오한다고 잘 될 문제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이 죽고 난 뒤에 여운처럼, 긴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보다 더 길고, 더 깊고, 더 넓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미 죽어버린 시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훼손되어지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아무리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망자의 존엄성만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사람이 그동안 지은 죄는 그 사람의 사망으로 어느 정도 죄 값은 치렀다고 쳐주고 그 후까지 시신을 훼손하는 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서 유대나라의 우상숭배자들의 시신을 철저하게 유린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그들이 섬겼던 해와 달과 별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뼈가 먼지가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와같이 죄의 범주가 인간이 지었다고 여기는 그 범주보다 넓은 것은 진정한 죄라는 것은 인간이 몸으로 지은 죄로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근원적인 죄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관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 곧 예수님의 몸으로서 표현되고 규정되는 넓은 범위의 죄가 따로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죄의 범위가 넓은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생각지도 못했던 의의 궁극적인 지점까지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그 의는 곧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도 이런 취지입니다.(롬 5:20) 은혜의 능력이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가 제공되는 그곳까지 인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의(義)의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와 의의 규정을 자신의 몸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선악을 아는 지식을 확보했기에 그 범위 내에서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양심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자기 몸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나 행동에 세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몸입니다.

돌발적인 사태에 대해서는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준해서 선과 악을 분류하다보니 늘 주인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해석이 진행됩니다. 즉 “어쩔 수 없었어”라고 식으로 자기 방어를 하게 마련입니다.

어차하면 ‘내 몸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이 한 몸을 죽었다고 그것으로 값을 다 치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 접어들어서, 예수님의 몸이 등장하기 전에, 그러니까 사람들의 자기 몸만을 믿을 때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처럼 각자의 구원은 각자의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보고 열심히 하나님의 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의 몸이 등장하므로서 이러한 자기 몸 위주, 선악과 위주의 선과 악의 규정은 다 무용지물임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3:14에 보면,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치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의 몸체도 들리는 용도가 된다는 겁니다.

들린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이상 자기 몸쪽으로 돌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상 일이 눈 앞에 높이 들리는 저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결정난다는 겁니다.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죄인지는 예수님의 몸으로 판가름됩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하신 일을 모르는 것이 영원한 죄가 딥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몸과 다른 새로운 몸의 등장의 의미를 말해주는 겁니다. 즉 선과 악은 인간의 몸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등장한 낯선 몸인 예수님의 몸으로 비로소 규정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온전히 저주를 다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로서 저주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짧은 세월만이 생존하는 인간의 몸 가지고서는 죄의 깊이와 넓이와 거기에 따른 저주의 강도를 다 보여줄 수가 없고 맛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곧 생명나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선악과 범위 안에서 선과 악을 논하지만,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은 그 생명나무 관점에서 선악과의 세계 자체를 죄로 규정지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죽으시면서 이 세상의 모든 저주를 다 한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인간들이 집안에 우환이 있고, 자기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나타나는 상실감하고는 족히 비교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정한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이로서 원죄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이 저지른 행위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악마의 반감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8:29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대뜸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를 멸하러 오셨군요”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14-15에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거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정사와 권세’란 그동안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의 세력을 뜻합니다. 인간들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껏 신에게 비는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악마가 메시아임을 알아보시고 예수님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우리끼리 잘해보자”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 그저 세상 부귀 영화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뻔하니 그런 식으로 예수님도 이 세상 사람으로 그냥 눌러앉아 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유일하게 죄의 세계에서 벗어난 분이십니다. 뿐만아니라 부활하셔서 그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 악마의 작당을 책망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신이 완벽하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어떻게 하면 드러낼 수 있느냐라는 용도로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세계, 생명나무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몸을 기준해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입장에서 선악과 세계를 똑바로 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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