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9. 18:05

울 음 (예레미야 7장 29-34절)

울음

2009년 9월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7:29-34

(렘 7:29, 개정)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
(렘 7:30, 개정)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렘 7:31, 개정)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렘 7:32, 개정)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렘 7:33, 개정)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렘 7:34, 개정)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성경을 펴면 거기에 하늘의 판정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옵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 본다든지 설교 말씀을 외면해버리면 이는 곧 하늘의 판정관의 존재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 판정관은 일시적인 것으로 가지고 판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를 다 판단해서 판정을 내리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울어라!”는 말씀도 먼 미래를 미리 생각해서 울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예레미야 시점에서 볼 때 먼 미래를 찾아가봅시다. 왜 유대인들이 울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마태복음 8:11-12에 보면,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장소, 곧 어두운데서 울게 되는 이곳이 바로 지옥인데 그 최종적 지옥이 구약시대에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입니다. 어째서 이곳이 지옥이 되느냐 하며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평소에 인간들이 좋아하던 신과 영원히 붙어살도록 조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이 본질을 알게 하시는 방식은, 흠없는 제물을 통해서 인간이 죄인임을 알려주는 방식인 반면에, 이방신에 있어 인간의 본질이란 ‘인간이란 신으로부터 축복받을 권리나 자격이 있음’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의 하나님의 의도와 그 율법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도가 상호 달랐습니다. 율법은 받은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두 가지 결과, 즉 축복과 저주 사이에서는 그들은 서슴없이 축복쪽을 선택한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예를 들면, 독약과 양약 가운데서, 독약의 색깔은 너무 참하고 양약의 색깔이 너무 거무스럼하니 사람들이 얼른 독약 쪽으로 손이 가버린 식입니다.

즉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식으로 주어지느냐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무엇을 획득할 수 있느냐’에 욕심이 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원치않고 나의 욕망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버린 겁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없습니다. 자신의 몸이 즐기고 싶다는 쪽으로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게 아닙니다. 도저히 복받을 근거가 전혀 없는 인간들에게 어떤 연유로 축복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내막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즉 축복이란 인간들의 행함에서 형성되지 않는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연결에 성공했다는 그 이상한 기적에 초점이 있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만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과 관심사가 동일한 관심사를 갖추려면 기존의 인간의 관심사는 여지없이 정죄당해 붕괴되어야 합니다. 이 붕괴작업이 곧 하나님의 축복 과정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축복과 저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은 하나마나입니다. 누구나 축복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선택이 곧 저주선택이 된다는 말입니다. 축복을 선택하지 말라고 축복제안을 한 것인데 그만 인간은 자기 주제도 모르는채 축복을 선택하므로서 축복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자가 축복을 선택할 경우에 당할 저주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성도 앞에 축복과 저주가 놓여 있다면 성도는 그 선택의 권한을 자신이 행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맡기고 미뤄야 합니다. 만약에 성도가 마치 자기에게 축복과 저주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사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선택권을 뺐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취지를 훼손하고 가로막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준수 자격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운명을 책임지시는 ‘주의 이름’에 해당되시는 분이 율법의 진수를 하자나 착오없이 준수해서 이루어져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의 이야기는 ‘이러이러하면 복받고’ ‘이러이러하면 저주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축복을 선택하지 저주를 선택한 위인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따라서 율법을 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봤어야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있으나 마나하는 것으로 돌려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경우는 마치 다음과 같은 경우와 같습니다.

어느 사람이 명절을 앞두고 자신을 가르친 은사님의 집에 참치 세트 선물을 들고 가다가 마침 고등학교 친구가 이 근처에서 개척교회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들리기 위해 교회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라는 친구는 오랜간 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 손에 선물 보따리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에게 줄 선물인 줄 알고, “뭐 친구끼리 이런 선물을 들고와 빈 손으로오지 않고” 하면서 무거운 짐을 덜어준다는 에티겟을 발휘합니다. 어지간하면 그 목사가 오해한 것이니 그냥 줘버리고 은사집에는 똑같은 것 하나 더 사가지고 가면 될터인데 이 목사를 방문한 친구가 얼마나 고지식한 사람인지 단호하게 그 손길을 뿌리칩니다.

“아니야, 이 선물은 우리 은사님에게 줄 선물이지 너에게 주려고 산 선물이 아니야. 너에게는 선물없이 그저 무심코 잠간 들린 것 뿐이야”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을 때, 그 둘 사이의 공기는 무겁게 깔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보고 지키라고 준 율법은 인간들이 마치 자력으로 지키면 복받을 줄로 알고 덜렁 그 율법 보타리를 자기 것으로 돌리려 하는 겁니다.

신명기 27:4에 보면, 하나님의 제단은 축복산이라고 이름붙여진 그리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에발산에 놓이게 됩니다. 즉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자에게는 축복이 주어지고 자신이 축복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주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알았던 것은, 율법의 기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보면, 성령받은 빌립집사님이 나오는데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전도를 하면서, 이사야를 통해 오로지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풀이해주었습니다. 순간적인 흥겹고, 즐겁고, 신나고, 출세한 것으로 ‘축복’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이는 실은 울고 대성 통곡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간은 이런 축복관과는 정반대로 저주받은 행색으로서 나타나셨습니다. 즉 우리는 결코 축복받을 자격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먼 미래를 보면서 오직 복음을 전하는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저주받아야 하는 자인 것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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